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약이 보이질 않는다. 어딘가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영원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신이 그걸로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것이 생기자 다른 건 정말 작게 느껴진 것이다. 그가 당장 직면한 ‘문제’는 굳건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승의 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는다. 그는 비상용 도끼를 꺼내왔다. 다...
관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결론짓는다. 우린 전부 망했다고. 그는 죄의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그의 눈은 그 연결고리를 쉽게 찾게 해주는 수단이다. 그러나 대왕님의 명으로 제한된 그의 눈이 닿는 곳은 오직 명부가 있는 인간뿐이다. 유담의 명부는 지나친 생과 죽음의 반복으로 찢겨져 나간지 오래다. 그가 용담꽃, 유담에 대해 아는 것은 그의 시발점 정도이다. 그...
영원은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밟으며 가게 내부로 들어선다. 노을이 들어와 비추는 공간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기만 하다. 폐업하고 정리하는 가게도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깨진 화분들에 흙만 잔뜩인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숨어버린 모양이다. 쪽지 하나가 떨어져있었으나 영원은 그 안에 쓰인 문자를 읽지 못한다. 그가 모르는 ...
관리는 저승에서 나가지 않는다. 긴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망자를 인도하고 집행한 그에게 그들은 흘러가는 순간들에 불과했으나, 몇 명 기억나는 이들은 존재한다. 저승사자를 속이고 저승을 탈출한 이부터 거래로 망자를 빼돌린다던가, 멀쩡히 저승길 가다 자기 혼을 갈기갈기 찢는 이까지 다양했다. 개중에서도 ‘그 자매’는 아직까지 관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그...
유담은 가끔 꿈을 꾼다. 흙 위를 기어가는 짐승이 되는 꿈을. 새까만 구렁이의 기나긴 천 년의 꿈을. 아주 어릴 때는 그저 스쳐가는 의식의 편린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그것의 이름을 붙일 줄 안다. 심상의 중심은 언제나 푸르른 나무 한 그루에 집중되어있었으므로. 그것은 용의 미련이자, 안타까워 흩어지지 못한 용의 애정이었으니. 유담은 그걸 외면할 수 없었다....
저승길의 계단은 총 10칸이다. 과거의 저승은 망자를 안내하고 재판하며, 죄를 벌하는 과정을 일일이 행했으나, 인간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현재는 그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야 했다. 일은 지나치게 많았으나 사용할 수 있는 인력은 지나치게 적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문제도 지나치게 발발하고 있으나 별 조치는 취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빈틈은 반창고로 엉...
“차가 아주 가버렸으니. 버스나 타야겠네요.” “도로에 차 하나 없는데 말이죠. 계속 궁금했는데, 여기 혹시 유령동네인가요. 무슨 사람 하나 없어. 이런 데서 가게가 되기는 해요?” “유령들 있잖아요. 그리고 영원 씨 지금 길 막고 있어요.” “길이요?” “참, 영원 씨는 못 보지.” 유담은 영원의 손을 끌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영...
온몸에 들러붙은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 창문이라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까부터 손톱으로 끼이익 끼이익 차를 긁어대는 소름끼치는 생김새의 요괴가 바짝 붙어있어서 그냥 코를 막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운전이 쉬운 거였으면 진즉 면허 시험이나 볼걸. 영원은 부디 한낮에 시속 100으로 달리는 차를 경찰들이 보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엑셀을 밟...
분위기는 냉담해지고, 숨막히는 적막함만 남기며, 그들은 가게로 돌아왔다. 영원은 이제 그냥 집에 가고싶어졌다. 출근한지 세시간째였다. 돌아온 가게는 여전히 푸릇푸릇한 식물로 가득 차 있었고, 영원은 그것들 전부가 벌떡 일어나 달려드는 생각을 했다. 쭈뼛쭈뼛 벽에 기대 있으려니 유담은 차키를 탁자에 놓고 화분을 정리했다. 영원은 유담을 도와주려 몸을 움직이려...
“그럼, 정확히 제가 하는 일이 뭔가요? 오늘처럼 배달이에요? 그, 사장님?” 영원은 조수석에 앉아 물었다. 손엔 유담이 수고했다며 쥐어준 사과주스를 꽉 쥔 채였다. 운전을 하던 유담은 그를 흘끗 확인하곤 전방을 보며 답해주었다. “당분간은요. 산에서 도망친 게 저 모녀만은 아니거든요. 원래 배달은 잘 안해요. 내가 누군지 알잖아요. 호시탐탐 노리는 자...
몇 시간을 유담에게 부려진건지 모르겠다. 영원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야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근로계약서까지 쓰고 사본을 든 채였다. 걸어가면서도 현실감은 잘 들지 않았다. 문득 내려다보니 손과 칼에 묻은 남의 피가 선명했다. 영원은 근처 공원 화장실에 들어가 피를 씻어냈다. 굳은 피는 까맣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 새빨개질 때까지 문지른 ...
유담은 화분을 옮겨주라 청했고, 영원을 그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무거운 화분을 옮기려니 죽을 맛이었다. 영원은 반으로 갈라져버린 화분의 잔해를 치우며 집을 잃은 식물에게 사과했다. 그러다 꽃집에 있기엔 너무 흔한 꽃을 보았다. 민들레였다. 그 작은 꽃이 제 몸집의 세 배는 되보이는 화분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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